레디메이드 – ‘변기’가 예술이 된 순간 : 

마르셀 뒤샹 [ 샘, 1917 ]

‘남성용 소변기’ 예술의 역사를 바꾸다

1917년 뉴욕, 출품작을 둘러보던 위원들은 한 물건(작품) 앞에서 고민에 빠집니다. “이것을 전시해야 하는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전시대 위에 진지하게 놓여 있는 ‘남성용 소변기’였습니다. 소변기에는 ‘R. Mutt 1917’이라는 서명과 함께 [ 샘, Fountain ]이라는 작품명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프랑스 출신 예술가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이 ‘R. Mutt’라는 가명으로 출품한 [ 샘 ]은 전시되기도 전에 주최 측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이후 예술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냅니다.

레디메이드 Ready-made로 불리는 이 개념의 파급력은 혁명과도 같았지만, 그 방법은 놀랍도록 단순했습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품을 가져와 예술 작품으로 선언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뒤샹은 이 단순한 행위를 통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레디메이드 ready-made?

일상의 물건이 → 예술 작품으로

레디메이드 ready-made
1. (먹거나 이용할 수 있도록) 이미 만들어져 나오는 / 기성품의
2. (직접 만들거나 생각할 필요 없이) 이미 주어진

‘레디메이드’라는 용어는 뒤샹이 1915년경부터 의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개념으로, 문자 그대로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미 제작된 상품을 선택하고 → 새로운 제목을 부여한 후 → 서명을 더하는 행위만으로, 기성품을 ⇒ 예술작품으로 변환시켰습니다.

예술가 = ‘선택’하는 사람

“나는 물건들을 창조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들을 선택했다”   마르셀 뒤샹

‘레디메이드’의 핵심은 예술가의 ‘선택’ 행위에 있습니다. 뒤샹에게 중요한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예술의 맥락 안에 위치시키는 결정과 행동이었습니다.
이는 예술가의 역할을 창작하는 사람에서 ‘선택’하는 사람으로 전환하는 혁명적인 개념이었습니다.

뒤샹의 방식은 예술 작품의 가치를 작가의 손기술(숙련도)이나 표현력(미적 감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등장하는 개념미술의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파격과 전복의 아이콘 : [ 샘, Fountain ]

‘소변기’가 ‘예술품’이 되는 과정

예술 작품 [ 샘 ]이 탄생하는 데 뒤샹이 한 행동은 다음 세가지가 전부입니다.

  1. 위생 설비 회사에서 생산한 표준형 남성용 소변기를 구입 (J.L. Mott Iron Works의 Bedfordshire 모델)
  2. 하단에 ‘R. Mutt’ 라는 가명으로 서명 (당시 인기 만화 ‘Mutt and Jeff’에서 따왔다는 설과 ‘가난’을 의미하는 독일어 ‘armut’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3. ‘F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출품

이 세 가지 간단한 행동으로, 뒤샹은 평범한 ‘위생 설비’를 20세기 가장 논쟁적인 ‘예술작품’으로 변모시켰습니다.

전시 거부 :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설립(1916년)‘독립 예술가 협회 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는 보다 많은 예술가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전시회를 운영하고자 했습니다.
[ 샘 ] 이 출품된 1917년도 전시회의 참여 조건도 ‘출품료 6달러’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협회 위원들은 ‘R. Mutt’가 출품한 [ 샘 ]을 “저속하고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거부합니다.
당시 위원 중 한 명이었던 마르셀 뒤샹은 이에 항의하며 위원직을 사임합니다. (뒤샹은 가명으로 [ 샘 ]을 출품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가벼운 해프닝으로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던 그 작은 사건 이후 예술계의 지형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누가 예술을 정의하는가?”

‘작품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웠던 협회의 ‘거부’ 결정은 뒤샹이 비판하고자 했던 예술계의 위선편협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모든 것이 뒤샹의 치밀한 계획대로 진행된 셈입니다.)

The_blind_man - 뒤샹 - 샘 - 변기

작품이 거부된 후, 뒤샹은 동료 예술가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에게 [ 샘 ]의 사진 촬영을 주선했고, 이 사진은 다다이스트 잡지 「 블라인드 맨 」에 게재됩니다.

“R. Mutt가 샘을 만들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그것을 선택했다. 그는 평범한 일상의 물건을 취해, 새로운 제목과 관점 아래 놓음으로써 그 물건의 유용성을 사라지게 하고 그것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창조했다”   「 블라인드 맨 The Blind Man

다다이즘 Dadaism’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과 기존 가치관의 붕괴를 목격한 예술가들 사이에서 등장한 운동의입니다. 다다이스트들은 사회를 전쟁으로 몰고간 서구 앨리트들의 관습과 권위를 조롱하고 해체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만들어 갔습니다.

원본 분실

흥미로운 점은 [ 샘 ]이 사진 촬영 직후 분실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작품이 단순히 버려졌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지금 우리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 샘 ]은 모두 1964년 이후, 뒤샹의 감독 하에 제작된 복제본입니다.
복제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원본보다 더 강력하게 ‘레디메이드’의 개념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다시 사오면 그만)

현재 전 세계에 16개의 공인된 복제본이 존재합니다.
그 중 하나가 2010년 경매에서 120만 파운드에 낙찰되었습니다.

예술사에서 ‘레디메이드’의 위상

“시각보다 사고를 자극하는 예술”

뒤샹은 [ 샘 ]을 통해서 예술 작품의 가치가 물리적 특성이나 기술적 완성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극하는 사고질문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샘 ]이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20세기 예술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예술의 정의 그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제고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2004년, 500명이 넘는 예술가와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 샘 ]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작품’으로 선정됩니다. 

개념미술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은 196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한 개념미술 Conceptual Art의 직접적인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개념미술은 작품을 만드는데 들이는 노력보다 아이디어와 개념을 중시하는 예술 경향으로, 뒤샹의 레디메이드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예술운동입니다.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하나이면서 셋인 의자-One and Three Chairs
조셉 코수스 [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 One and Three Chairs, 1965, 뉴욕 · MoMA 미술관 ]

조셉 코수스 Joseph Kosuth와 같은 개념미술가들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직접적으로 계승하며, 예술이란 “물질적 형태가 아닌 의미의 창조”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레디메이드가 현대 예술에 끼친 영향 :

일상이 예술이 되는 순간들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들

뒤샹은 ‘소변기’ 외에도 다양한 물건(레디메이드)을 선택해 예술 작품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마르셀 뒤샹_Marcel Duchamp - 자전거 바퀴_Bicycle Wheel - 1913 - 레디메이드_Ready-made

1913 [ 자전거 바퀴, Bicycle Wheel ]

의자 위에 자전거 바퀴를 거꾸로 고정한 작품으로, 조각과 기계의 경계를 무너뜨린 뒤샹의 첫 레디메이드로 알려져 있습니다.
움직임과 균형에 대한 뒤샹의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는 이 작품을 “움직임을 보는 것이 좋아서 (무용한 기능미)” 만들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마르셀 뒤샹_Marcel Duchamp - 병 건조대_Bottle Rack - 1914 - 레디메이드_Ready-made

1914 [ 병 건조대, Bottle Rack ]
와인병을 말리는 금속 선반을 그대로 가져온 작품으로, 아무런 물리적 변형 없이 선택된 최초의 ‘순수 레디메이드’로 평가받습니다.

마르셀 뒤샹_Marcel Duchamp - 부러진 팔 앞에_In Advance of the Broken Arm - 1915 - 레디메이드_Ready-made

1915 [ 부러진 팔 앞에, In Advance of the Broken Arm ]

단순한 눈삽에 수수께끼 같은 제목을 붙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일상 도구와 제목의 불일치를 통해 새로운 의미의 차원을 열었습니다.

1917 [ 샘, Fountain ]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도발적인 실험을 이어갔습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일상 물건들이 뒤샹의 ‘선택’을 통해 예술의 지위를 얻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예술 & 레디메이드

뒤샹의 혁명적인 발상은 20세기 후반 예술의 흐름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앤디 워홀 - 캠벨 수프 캔_Campbell’s Soup Cans - 1962
앤디 워홀 [ 캠벨 수프 캔, Campbell’s Soup Cans, 1962, 뉴욕 · MoMA 미술관 ]
데미안 허스트_damien hirst - 박제 상어_shark
데미안 허스트 [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1991 ]
제프 쿤스_Jeff Koons - 풍선 개_Balloon Dog
제프 쿤스 [ 풍선 개, Balloon Dog, 1994~ ]

 

일상과 예술 사이,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예술 창작의 전통 기준(기술, 미적 감각, 독창성)에 대한 재평가를 이끌었으며, 예술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권력(다양한 제도, 교육, 시상, 경매 … )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돌아보게 했습니다. 이제 예술은 더 이상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인식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 샘, 1917 ]이 등장한 지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제기한 질문은(예술의 정의, 예술가의 역할, 그리고 예술 제도의 권위 등)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뒤샹이 [ 샘 ]을 통해 보여준 예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개념이며, 그 가치는 미적 특성이 아니라 사고를 자극하는 데 있다.
  •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예술가의 역할은 창조자에서 선택자로 확장되었다.
  • 누가 예술을 정의하는가?
    제도화된 권력이 예술의 정의를 독점해 왔지만, 우리는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는 유동적이며 계속해서 재규정 된다.

[ 샘 ]은 예술의 진입 장벽을 낮추면서 동시에 철학과 미학에 대한 사고를 심화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예술가들은 작품을 창작하고 전시하는 데 더욱 수월해졌는데, 왜 대중들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느끼는가?”

어쩌면 예술은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낮춘 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