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로스앤젤레스의 페러스 갤러리 Ferus Gallery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렸습니다. 전시장에는 각기 다른 맛의 ‘캠벨 수프 캔 Campbell’s Soup Cans’이 그려진 캔버스 32개가 선반 위에 나란히 진열(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팝 아트’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당시, 작품을 처음 접한 관람객들의 표정에는 당혹감과 호기심이 공존했습니다. 아마도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프 캔이 왜 갤러리에 있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대중의 반응은 당연했습니다. 미술관은 ‘권위있는 명작’이나 ‘숭고한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들이 전시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앤디 워홀은 슈퍼마켓에서 누구나 살 수 있는 (레디메이드) 통조림을 예술 작품으로 선보인 것입니다.
마트(갤러리)에 진열(전시) 된 : [ 캠벨 수프 캔 ]
1960년대 초 미국은 전후 경제 호황을 바탕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회로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신문, 잡지, TV에선 다양한 브랜드의 광고가 넘쳐났고, 익숙한 상품 이미지들이 매일매일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와 일상 곳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앤디 워홀은 이런 시대 변화를 예리하게 감지하고 반응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캠벨 수프’는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이 애용하는 상품입니다. 슈퍼마켓 식품 코너 선반에 나란히 진열되고, 저녁 식사 메뉴로 소비된 후, 버려지는 평범한 상품입니다.
앤디 워홀이 [ 캠벨 수프 캔 ] 연작을 통해 던진 질문은 명확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것들이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마트와 갤러리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 봅시다.
공통점 : 둘 다 상품(작품)이 깔끔하게 진열(전시)되어 있습니다.
차이점 : 갤러리는 특별이 전시된 작품을 특정한 사람들이 감상하고 그중 소수가 구매합니다. 마트는 다수의 사람들이 즐겨 소비하는 상품을 대량으로 진열하고 대량으로 판매합니다.
갤러리의 작품은 사치품으로 가격이 높아질수록 선호되는 반면, 마트의 상품은 생필품으로 가격이 낮아질수록 환영받습니다
[ 캠벨 수프 캔 ] 연작은 이 둘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흔들고 있습니다.
“왜 수프 캔을 그리는가?”

앤디 워홀이 선택한 ‘캠벨 수프 캔’은 대량생산과 빠른 소비를 대표합니다. 또한 당시 미국인에게 매우 익숙한 이미지를 선택해, “예술이 꼭 고상한 것만 그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기존 예술계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왜 수프 캔을 그리는가?”라는 질문에 앤디 워홀은 “먹는 걸 좋아하니까”라고 답했습니다. 언뜻 가볍게 들릴 수 있지만, 이 짧은 대답에는 “어제 저녁, 먹고 버린 수프 캔도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앤디 워홀의 팝 아트는 예술이 더 이상 ‘숭고한 것’ ‘아름다운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문화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산 → 진열 → 소비, 그리고 버려지는) 소비사회의 본질을 그대로 담아낸 작품
“팝 아트는 예술가들의 캔버스가 거울이 되어 소비사회를 직접 비춰낸 것” Lucy R. Lippard 「Pop Art, 1966」
오늘날 우리가 일상 속의 상품이나 대중스타 사진이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앤디 워홀과 같은 팝 아트 작가들이 열어놓은 새로운 시각 덕분입니다.
→ 팝 아트의 시작을 알린 전시 ‘This is Tomorrow’
레디메이드 & 맥락
레디메이드 ready-made
1. (먹거나 이용할 수 있도록) 이미 만들어져 나오는 / 기성품의
2. (직접 만들거나 생각할 필요 없이) 이미 주어진
마르셀 뒤샹의 ‘변기 or 샘’
공장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예술로 끌어들인 건 앤디 워홀이 처음은 아닙니다.
[ 캠벨 수프 캔, 1962 ] 연작 보다 약 45년 전인 1917년, 프랑스 출신의 예술가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은 평범한 상점에서 산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라는 서명을 하고 [ 샘, Fountain ]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에 출품했습니다.

뒤샹은 (기성품)레디메이드를 별다른 변형 없이 전시장으로 옮겨놓고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겁니다.
작가의 서명 (R. Mutt)이 표기된 소변기는, 예술 작품의 가치가 아름다움이나 솜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맥락 context’에 놓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급진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맥락 context :
1. 脈 혈맥 맥ㆍ絡 이을 락(낙) / 혈관이 서로 연락되어 있는 계통.
2.사물 따위가 서로 이어져 있는 관계나 연관
Context vs Text :
1. 텍스트는 글자로 표현된 내용이고, 컨텍스트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배경이나 환경을 말합니다.
2. 텍스트는 고정되어 있지만, 컨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다의적일 수 있습니다.
뒤샹의 주장처럼,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레디메이드)도 특정한 맥락 속으로 진입하면 (갤러리에 전시되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후 20세기 미술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 일상의 전복 :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성중)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을 가장 다양하게 변주한 미술사조가 바로 ‘팝 아트’입니다. 특히 ‘앤디 워홀’은 이 개념을 한층 더 발전시켰습니다.
앤디 워홀이 작품에 활용한 것은 레디메이드 자체가 아니라 레디메이드의 이미지였습니다. 그는 상품 로고, 유명인의 사진, 만화 캐릭터 등을 작품 소재로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캠벨 수프 캔’ 이미지는 대량생산 → 대량소비 되는 소비사회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는 완벽한 소재였습니다.
워홀 vs 뒤샹
뒤샹과 워홀은 모두 레디메이드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지만, 그 방식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뒤샹은 새로운 맥락 속에 레디메이드를 옮겨놓고 예술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워홀은 대량생산 된 레디메이드의 이미지를 ‘복제 & 반복’하면서, 현대 소비사회의 모습을 작품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미지의 반복
32가지 맛의 [ 캠벨 수프 캔, 1962 ]
[ 캠벨 수프 캔, 1962 ]은 32종의 서로 다른 수프 맛을 각각 하나의 캔버스에 그린 연작입니다. 각 캔버스에는 토마토, 치킨 누들, 버섯 크림 … 등 당시 캠벨사 The Campbell’s Company가 판매하던 32가지 맛의 수프 캔이 하나씩 그려져 있습니다.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 전시되어 있는 원작은 갤러리 벽면에 4열로 나란히 배열 되어 있습니다.
1962년 첫 전시 때는 슈퍼마켓의 상품처럼 진열대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마시곤 했다. 나는 매일 같은 점심을 먹곤 했다. 내 생각에, 같은 것을 반복해서 먹었다. I used to drink it. I used to have the same lunch every day, for 20 years, I guess,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앤디 워홀
이 짧은 인터뷰는 앤디 워홀이 ‘캠벨사의 수프 캔’을 선택한 맥락과 함께, 반복되는 현대인의 일상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소재의 반복 :
여러 버전의 [ 캠벨 수프 캔 ] 시리즈
[ 캠벨 수프 캔, 1962 ]은 캔버스에 손으로 직접 그린 작품입니다.
앤디 워홀은 마치 (한가지 맛으로) 성공한 상품이 (여러가지 맛의) 다양한 버전으로 출시되는 것처럼, ‘캠벨 수프 캔’ 시리즈를 여러 형태로 ‘출시’ 했습니다.
이러한 접근그의 작품이 지닌 상품성과 예술성의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만듭니다.주요 버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캔버스에 붓으로 그린, 첫번째 버전

- 1961~62년 제작, 32개의 서로 다른 맛의 캠벨 수프를 각각 캔버스에 하나씩 표현
캔버스에 핸드 페인팅, 51 x 41㎝ - 1962년 첫 전시, 로스앤젤레스의 페러스 갤러리 Ferus Gallery
- 1996년, 뉴욕 현대미술관 MoMA이 약 1500만 달러에 구매
변형된 페인팅 버전

- 1965년, 기존의 빨간색과 흰색 대신 다양한 색상을 사용
91×61㎝ 크기의 20개의 캔버스로 구성
- 1970년대, 찢어진ㆍ벗겨진 라벨, 찌그러진 캔, 열린 뚜껑 등 다양한 변형
실크스크린 버전
- 1980년대 이후, 총 100개 이상의 변형된 작품 제작
-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한 대량 생산

하나 vs 다수 :
반복 & 의미의 변화
앤디 워홀의 [ 캠벨 수프 캔 ] 시리즈가 현대미술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반복’되는 이미지를 통해 ‘의미’의 변화를 탐구했기 때문입니다.
“반복된 복제를 통해 의미가 사라지거나, 혹은 새로운 의미가 생겨난다”
충격적인 장면의 반복
15중 추돌 사고 같은 대형 교통사고는 뉴스에서 크게 다루어지지만, 한두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교통사고는 더 이상 뉴스에서 크게 다루지 않습니다. 비슷한 사고 소식이 계속 반복되면 처음의 충격은 점차 수그러들고 타인이 격는 안타까운 일 정도로 취급됩니다.

앤디 워홀은 [ 캠벨 수프 캔, 1962 ] 전시 1년 후, 끔찍한 자동차 사고 장면을 반복 배치한 [ 은색 차 충돌 (이중 재난), 1963 ]을 발표합니다. (앤디 워홀의 ‘죽음과 재난 시리즈’중 하나)

왼쪽에는 똑같은 사고 이미지가 반복되어 있고, 오른쪽은 텅 비어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의미 포화’라는 심리학 현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는 해석이 따라 다닙니다.
의미의 포화 상태 : 무감각
- 반복되는 단어나 문구가 일시적으로 의미를 잃게 하는 심리 현상으로, 청자는 반복적인 의미 없는 소리로 인식하게 됩니다.
-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게슈탈트 붕괴’는 일본에서 기원한 용어로 심리학 용어는 아닙니다.
‘의미 포화’ 개념으로 이 작품을 해석하면
- 끔찍한 사고 이미지를 반복해
- 공포와 충격을 주던 반응이 점차 무뎌지고
- 결국 좌측의 은색 화면처럼
- 추상 이미지만 남게된다.
현대인들의 무감각은 ‘감각 없음’ 보다 < ‘너무 강한 자극들에 지친 마음’에 더 가깝습니다. 대중들이 미디어를 통해 비극적인 소식을 계속 접하면서 재난 보도를 하나의 영화처럼 소비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의미의 내면화 : 트라우마
‘반복 → 무감각’이라는 공식과는 결을 달리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오히려 충격적인 이미지의 반복은 감정의 표출을 억압하고 내면으로 밀어 넣어 자신도 모르게 트라우마로 자리 잡게 할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두 해석 모두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반복’되는 이미지가 ‘의미’를 변형시킨다는 겁니다.
- 처음에는 “흔한 수프 캔이군”이라는 생각도,
- 같은 이미지를 계속 마주하다 보면 ‘흔한 수프 캔’의 이미지는 점점 옅어지고
- 갤러리라는 맥락 안에서 ‘수프 캔 =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전환 된 후,
- 결국에는 ’예술작품 = 수프 캔’은 어떤 상징을 갖고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앤디 워홀의 메세지는 분명합니다.
“일상은 예술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익숙함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운 시각을 갖는다면.”
이미지 반복을 통한 의미의 변화는 앤디 워홀이 즐겨 사용한 실크스크린 기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실크스크린은 동일한 이미지를 여러 번 복제할 수 있는 기법입니다. 워홀은 이 기법을 통해 ‘반복’이라는 개념을 더욱 심도 있게 탐구했습니다.
→ 차용 & 반복 :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시리즈
자본주의에 대한 ‘경외’와 ‘비판’
[ 캠벨 수프 캔 ] 시리즈는 미국 사회의 풍요와 소비문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대량 생산이 선사해준 풍족과 편리함을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이 얼마나 쉽게 ‘소모’되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자유로운 소비를 즐기는 듯 보이지만, 자본 시장이 잘 다듬어 놓은 소비 패턴 속에서 순웅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팝아트가 단순히 ‘재미있는 대중 디자인’이 아닌,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거울” 역할을 하고있다” 「Arts Magazine」
“워홀이 이 수프 캔 이미지를 반복 생산함으로써 소비사회의 익숙함을 예술의 언어로 훌륭히 번역해냈다” 「Art in America – 2021년 3월호」
앤디 워홀의 작품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경외’와 ‘비판’이 미묘히게 공존합니다.
그는 미국의 소비문화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찬양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거리두기를 유지합니다.
워홀은 [ 캠벨 수프 캔 ] 이후에도 공산품, 광고, 스타의 사진 같은 대중 문화의 이미지들을 실크스크린으로 ‘반복 · 생산’하면서, 원본을 신성시하던 기존 예술관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앤디 워홀의 반복되는 이미지들은, ‘원본과 복제’의 경계가 모호하게 혼재되어 있는 디지털 시대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 아우라 : 이미지의 복제 & 의미의 변형 (작성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