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가 된 앨범아트 1 . 비틀즈 [ 페퍼상사 ]
- ‘팝 아트’ & ‘비틀즈’ : 1960년대 저항문화
- ‘콜라주’ 기법으로 엮어 낸, 위인들의 ‘단체 사진’
1960년 영국 리버풀의 작은 클럽에서 출발한 ‘비틀즈’는 몇 년 후 세계 최고의 밴드로 성장합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이어진 투어 공연 동안 비틀즈를 향한 열광적인 팬덤이 형성됩니다, 공연장뿐만 아니라 비틀즈가 도착하는 공항, 숙박하는 호텔 등 그들이 방문하는 장소들은 젊은 팬들로 가득했습니다. 언론들은 이러한 현상을 ‘비틀매니아 Beatlemania’라고 표현하며 취재 경쟁에 나섰습니다.
몇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밴드의 위상과 더불어 멤버들 개인도 나름의 방식으로 성숙해지고 있었습니다.
- 존 레논 : 창작 욕구를 영화나 초현실적 예술 실험으로 분산
- 조지 해리슨 : 인도 철학과 시타르 연주에 몰두, 비틀즈의 음악 방향과 다른 여정을 추구하기 시작
- 링고 스타 : 드럼 외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경향이 더욱 증가
- 폴 매카트니 : “비틀즈의 음악은 계속 혁신되어야 한다”는 입장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 페퍼상사 ]는 초기 기획과 앨범아트 그리고 스튜디오 작업까지 제작 전반을 ‘폴 매카트니’가 주도하게 됩니다.
록 음악 최초의 ‘콘셉트 앨범’ : Sgt. Pepper’s
‘페퍼상사’의 정식 명칭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입니다, 줄여서 ‘Sgt. Pepper’s’로 불립니다
폴 매카트니의 아이디어 : ‘가상의 밴드’ 컨셉
비틀즈는 10대들의 우상 이미지를 뒤로하고 새롭고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이는 뮤지션으로 거듭나려는 행보를 보입니다. 라이브 공연을 최대한 줄이고 스튜디오 작업에 집중하면서 비틀즈만의 색깔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폴 매카트니가 ‘가상의 밴드’ 컨셉을 제안하게 됩니다.
- “우리는 더 이상 비틀즈가 아니다. 새로운 밴드로 변신하자.”
: 비틀즈의 새로운 음악 컨셉을 ’과거와 현재를 아우루는 가상의 밴드’라는 이미지로 구현 - “이 밴드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라고 부르면 어때?” (음반의 정식 명칭)
- “앨범 커버도 이 밴드가 하나의 공연을 하는 것처럼 만들자.”
: 멤버들이 코스튬을 하고 등장 → 새로운 밴드 ‘페퍼상사’가 무대에 서 있는 장면처럼 구성
‘콜라주’ 기법으로 엮어 낸 ‘페퍼상사 밴드’ 이미지
폴 매카트니는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새롭게 주목받던 전위예술 전시회를 자주 방문하며 자연스럽게 화가들과 친분을 쌓아갔습니다. 그중에는 [ 페퍼상사 ]의 커버 디자인을 담당하게 되는 ‘팝 아티스트’ 피터 블레이크 Peter Blake와 잔 하워스 Jann Haworth도 있었습니다.
‘폴’의 잉크 스케치를 건네받은 피터 블레이크는 “밴드가 공원에서 공연한 직후, 관객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는 장면 처럼” 디자인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 “앨범 커버를 기존의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콜라주 형식으로 만들자.”
- “과거와 현재, 현실과 상상을 섞어 ‘가상의 그룹 사진’을 만들자”
‘폴’은 다음 내용을 강조했다고 전해집니다.
- “단순히 비틀즈 멤버들만 있는 게 아니라, 역사 속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키자.”
- “과거의 위인들도, 가상 밴드와 같은 시대 사람들처럼 보이게 하자”
‘뮤지션’의 실험 정신과 ‘팝 아티스트’의 상상력이 만나 새로운 시도가 가득 담긴 ‘앨범아트’ 제작이 진행됩니다.
완성까지 험난 했던 ‘앨범아트’ 제작 과정
아이디어들이 하나둘 현실로 옮겨지는 과정에는 창작의 즐거움과 함께 다양한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명의 멤버들이 추천한 사람들 중에서 … 70명이 선정됩니다.
자세한 인물 목록과 설명은 →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폴 매카트니 : 마를론 브란도(배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학자), 칼 마르크스(철학자) 등
- 존 레논 : 에드거 앨런 포(작가), 딜런 토머스(시인) 그리고 예수, 히틀러 등
- 조지 해리슨 : 간디, 스리 유크테스와르 기리 (힌두교 지도자) 등 주로 동양 철학과 영성을 강조
- 링고 스타 : 디자인 과정에 소극적, 개인 추천 인물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콜라주’ 과정에서 ‘선택 & 제외’ 된 인물
초상권 문제 :
다수의 유명인이 참여한 만큼 저작권 및 초상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작진은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여러 나라에 편지로 연락을 취하고 답변을 기다리는 데 수개월이 소요됐다고 전해집니다. (이메일이 없던 시대의 에피소드입니다.)
- 메이 웨스트 Mae West : 비틀즈 멤버들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할리우드 스타
“내가 왜 ‘외로운 하트 클럽 밴드’ 멤버가 되어야 하죠?”라며 거절, 비틀즈의 맴버들의 정성 어린 편지를 받아본 후 사진 사용을 승락 - 리오 고르시 Leo Gorcey : 배우, $400 요구로 제외 (2024년 기준 3,755달러)
- 일부 인물은 유족의 반대로 제외
정치 · 사회 · 종교 문제 : 히틀러, 간디, 예수
독재 국가에서 벌어지는 사전 검열과 같은 사상 통제는 아니었지만, 제작사(EMI)는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 인물을 제외했습니다.
- 히틀러 (존 레논 추천) : 촬영 단계에서 제외
“밴드 뒤에 숨겨서” 촬영했다고 전해집니다. (피터 블레이크 인터뷰) - 예수 (존 레논 추천) : 검토 단계에서 제외
1966년 당시 크게 논란이 되었던 ‘존 레논의 예수발언’ → link - 간디 (조지 해리슨 추천) : EMI 회장이 최종본에서 삭제
“한 국가의 상징적인 인물이 대중음악 표지에 사용된 것을 인도인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
한국 정부의 사전 검열
유신정권 시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 초판은 회손 없이 발매되었으나, 이후 ‘카를 마르크스’를 발견한 방송윤리위원회에서 삭제를 지시
- 금지곡 지정
A면 3번 트랙 :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B면 6번 트랙 : A Day in the Life
한국 현대사의 회색 빛 기억들 중 하나가 해외에서는 희귀 음반으로 고가에 거래되기도 합니다.
전례 없는 제작 비용 : 약 3,000 파운드
당시 평균 제작비는 50 파운드 였습니다.
보통 ‘콜라주’ 작품은 오래된 잡지에서 이미지를 오려내 사용합니다. 당연히 그림을 그리는 것에 비하면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완성 할 수 있습니다. 반면, [ 페퍼상사 ]는 평면의 종이 위가 아닌 3D 세트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박물관에서 대여한 밀랍 인형, 실물 크기의 등신대 (인물 사진 외각을 오려낸 판넬), 꽃 장식 등, 소품을 마련하고 세트에 적절히 배치하는 데 예상을 훌쩍 초과하는 지출이 발생했습니다.
평면 → 3D 세트
이점이 기존 콜라주 작품들과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 런던의 마담 투소 박물관의 실물 크기 밀랍인형 9개 대여
- 초상권 문제가 해결된 인물들의 고화질 등신대 57개 제작
- 화려한 꽃장식 등 다양한 실물 소품 맞춤 제작
기존 방식은 이젤이나 책상 놓을 공간이면 충분했지만 [ 페퍼상사 ]의 3D 콜라주 작업에는 넓은 스튜디오와 많은 스태프의 협력이 필요했습니다. 사진가 마이클 쿠퍼와 디자이너 피터 & 잰은 조명, 구도, 소품 배열을 수없이 조정한 끝에 최종 이미지를 완성했습니다.
전문가들의 창작물
- 디자인 : 피터 블레이크, 잰 하워스
- 아트 디렉터 : 로버트 프레이저 Robert Fraser
- 사진 촬영 : 마이클 쿠퍼 Michael Cooper
과거 다다 예술가들은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미술 작품을 제작하는 방법으로 ‘콜라주’ 기법을 제안했습니다. 반면 비틀즈의 앨범은 전문 교육을 받은 아티스트가 각 분야의 전문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이는 소규모 독림영화와 대자본 제작사의 블록버스터로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순수예술과 상업미술의 차이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미술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본에 기대어 발전해 왔습니다. 단지 당장 잘 팔리고 관심 받는 그림을 그리는 이와 자신의 관심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이로 나뉠 뿐입니다.
후자의 경우에도 결국 그림을 구입하는 사람은 비교적 여유 있는 사람입니다. 더욱이 다다이스트들이 쉽게 구했다고 생각하는 잡지 이미지들도 1910년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다이스트의 시도가 예술이 좀 더 대중을 향하도록 방향을 바꾼 것은 분명합니다.
예술과 상업의 경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예술품들은 어떤 고급 상품보다 소수를 대상으로 정교한 마케팅 전략을 통해 판매됩니다. ‘팝 아트’의 업적은 예술 소재의 대중화이지, 미술품 소장의 대중화는 결코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 페퍼상사 ]의 ‘앨범아트’는 ‘개인의 소장 ≒ 대중화’를 기획단계부터 면밀히 따진 ‘팝 아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성공 & ‘팀워크’의 균열
비틀즈의 가장 성공한 앨범
[ 페퍼상사 ]의 앨범아트는 긴 제작 기간과 예상을 크게 초과한 제작비로 음반사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안은 곧 환희로 바뀝니다.
- 출시 후 3개월 동안 250만 부 판매 (이전의 모든 비틀즈 앨범을 능가)
1967년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 전세계 누적 판매량 (2011년 기준) : 약 3,200만 장, 미국에서만 1,300만 장 이상 판매
- 50주년 기념반 (2017년 6월 2일 공개)
영국 앨범차트에서 1위, 빌보드 200 차트 3위
비틀즈의 분열의 시작점 : [ 페퍼상사 ]
[ 페퍼상사 ]의 ‘앨범아트’는 ‘이미지의 풍요로움 속에서 예술과 문화의 다양성을 포용의 메시지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앨범 녹음 과정에서 비틀즈 멤버들의 다양한 의견을 포용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새롭고 다양한 스튜디오 실험
[ 페퍼상사 ]는 당시에는 드물었던 (테이프의 역재생, 이펙트 등) 스튜디오 실험과 다채로운 악기 편성을 시도했습니다. 프로듀서 조지 마틴 George Martin과 비틀즈는 록 음악의 가능성을 크게 확장시켰다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다만 새로운 시도는 대부분 ‘비틀즈’가 아닌 ‘폴 메카트니’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폴의 강한 추진력이 없었다면 [ 페퍼상사 ]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주도권이 지나치게 강해지면서 다른 멤버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비틀즈 멤버 형성 과정
- 1956년, 존 레논이 비틀즈의 전신이 되는 밴드 ‘쿼리멘, The Quarrymen’을 결성
- 1957년, ‘쿼리멘’에 폴 메카트니 합류
- 1957년, 폴의 소개로 조지 해리슨 합류
- 1959년 부터 ‘비틀즈’로 활동
- 1962년 첫 메이저 앨범을 녹음하는 과정에서 링고 스타 합류
존 레논의 입장
“패퍼상사는 사실 폴의 앨범이지. 나는 그냥 거기에 몇 곡을 추가한 것뿐이야.”
비틀즈에 리더가 존재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존 레논이 밴드의 큰 형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존은 [ 패퍼상사 ]가 제작되는 동안 폴이 대부분의 방향을 정하는 모습에 점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 핵심 트랙은 모두 폴의 아이디어에서 나왔습니다.
A면 1번 트랙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B면 2번 트랙 : When I’m Sixty-Four
- 폴이 주도한 컨셉에 맞춰, 존은 자신의 곡들을 수정 했습니다.
B면 6번 트랙 : A Day in the Life (존의 곡에 폴이 후반부를 덧붙여 마무리합니다.)
- 존이 원했던 음악 실험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조지 해리슨의 입장
“패퍼상사는 내게 별 의미가 없었다”
조지 해리슨은 제작 과정에서 가장 큰 좌절을 경험한 멤버였습니다.
폴 매카트니는 레코딩에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며 복잡한 스튜디오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조지는 이런 방식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그냥 기타를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 조지는 당시 인도 음악과 영적 수련에 몰두하며, 비틀즈의 음악을 더욱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곡들은 거의 배제되었습니다.
- 단 한 곡이 앨범에 포함됩니다. (멤버들과 협업 없이 거의 혼자 작업)
B면 1번 트랙 : Within You Without You
링고 스타의 입장
“패퍼상사를 만들 때, 난 드럼을 칠 일이 거의 없었어. 그래서 그냥 체스를 두곤 했지.”
링고 스타의 영향력은 비틀즈 내에서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 패퍼상사 ]에서는 거의 역할이 없을 정도로 소외되었습니다.
- [ 패퍼상사 ]의 녹음 방식은 스튜디오 트릭을 활용하는 방식이었고, 링고의 자연스러운 드럼 연주를 점점 필요 없게 만들었습니다.
[ 패퍼상사 ]는 비틀즈 최고의 히트작이지만, 밴드 내부의 균형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어 이후 멤버들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 씨앗이 심어진 순간으로 이야기됩니다.
앨범은 역사적인 명반으로 남았지만, [ 페퍼상사 ]이후 멤버들 간의 협업은 더욱 감소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방식이 ‘비틀즈’의 음악을 더욱 다양하게 만들어냅니다.
1년후 발표한 [ 화이트 앨범, 1968 ]에서 멤버 각자의 색깔을 곡에 담아 더욱 다채로운 ‘비틀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