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상사’의 정식 명칭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입니다, 줄여서 ‘Sgt. Pepper’s’로 불립니다
명화가 된 앨범아트 1 . 비틀즈 [ 페퍼상사 ]
- ‘팝 아트’ & ‘비틀즈’ : 1960년대 저항문화
- ‘콜라주’ 기법으로 엮어 낸, 위인들의 ‘단체 사진’
1967년 발매된 비틀즈의 [ 페퍼상사 ] 앨범은 발매 후 며칠 만에 전 세계 주요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리마스터링된 ‘50주년 기념 앨범’이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며 49년 125일 만에 다시 정상에 오르는 기록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오랜 기간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비틀즈의 [ 페퍼상사 ] 는 수록곡들의 인기만큼이나 ‘앨범아트’ 또한 깊은 인상을 남기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2011년 기준 약 3,200만 장 이상 판매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국에서만 1,300만 장 이상 판매되었습니다.
‘콜라주’로 엮어낸 위인들의 ‘단체사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에드워드 시대 군악대) 의상을 입은 비틀즈 멤버들의 모습입니다. 그 주변에는 기념사진을 찍는 듯 여러 사람이 함께 서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인슈타인, 마르크스, 마릴린 먼로, 밥 딜런, 오스카 와일드 등 역사 속 인물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형광색 복장의 비틀즈 바로 옆으로는 바가지 머리의 또 다른 비틀즈 멤버들도 보입니다.
자세한 인물 목록과 설명은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link
콜라주 + 팝 아트 + 비틀즈 = [ 페퍼상사 ]
디자인은 ‘팝 아티스트’ 피터 블레이크 Peter Blake와 잔 하워스 Jann Haworth가 맡았습니다. 부부 사이였던 피터와 잰은 다양한 인물들의 ‘콜라주’ 기법으로 비틀즈가 마치 유명 인사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듯한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앨범 아트를 살펴보면 다양한 시대, 지역, 분야의 인물들을 선별하여 배치한 구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관련 없는 인물들을 한 무대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연출 기법이 ‘콜라주’의 핵심적인 특징입니다.
콜라주 collage
콜라주는 헝겊, 비닐, 타일, 나뭇 조각, 종이, 상표 등을 작품에 직접 붙이는 미술 기법을 말합니다.
- coller : ‘풀로 붙인다, 접착하다’는 의미의 프랑스어
- 1912∼3년경 입체파 화가들이 (브라크, 피카소) 신문지나 벽지, 악보 등을 그림에 붙이는 작품을 선보입니다.
- papier collé → collage : ‘파피에(종이를) 콜레(풀로 붙이다)’를 줄여서 ‘콜라주’라는 용어로 널리 쓰이게 됩니다.

20세기 초 다다이스트(다다이즘 예술가)들은 잡지나 신문에서 오려낸 이미지들을 한데 모아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의미’ ≒ ‘맥락을 전복’하는 방법으로 ‘콜라주’를 활용했습니다.
![존 하트필드 [ 만세, 버터를 다 먹었다!, 1935 ]](http://artcopost.com/wp-content/uploads/2025/02/하트필드_만세-버터를-다-먹었다-1935-212x300.jpg)
예를 들어 잡지 속 인물을 오려내 다른 이미지들과 조합하면, 그 인물이 지닌 (시대, 상징, 의미 등) 기존 맥락이 흔들리면서 독특한 메시지가 탄생하게 됩니다.
“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다! ”
다다 예술가들은 미술을 배우지 않은 사람도 손쉽게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콜라주’ 기법에서 커다란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 ‘기존의 방법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방법들’은 세월 속에서 잘 다듬어져 해당 분야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미술학교’를 다닌다는 말은 ≒ ‘전통미술’을 배운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면에서 다다이즘은 ‘전통 회화의 경계를 뛰어넘는 혁신을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팝 아트 : 기존의 틀을 깨다
1950년대 후반 등장한 ‘팝 아트’는 ‘다다이즘’이 추구했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직접 이어받아, 고귀함과는 거리가 먼 최신 유행 상품을 작품의 소재로 활용했습니다.
1960년대 유럽 : ‘권위’에 도전 하다
‘팝 아트’가 주류 미술로 자리 잡아가던 1960년대의 서유럽은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이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20년 전, 2차 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납니다. 파시즘을 거대한 세력으로 키워낸 구호는 ‘민족’이었고, 그것을 제압한 이들의 구호는 ‘자유’였습니다. 민족에 서열을 매기고 인종청소까지 자행한 나치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유를 수호한 사람들도 자신들 깊숙이 자리 잡은 ‘민족과 인종’, ‘신분과 직업’에 대한 서열 의식에 대해서는 관대했습니다. 승전국은 여전히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다는 사고도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전후 복구’가 최대 목표인 사회에서 ’기독교 윤리’는 ‘사랑’보다는 ‘규율’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귀족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세상은 여전히 ‘서열에 따른 권위’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유럽과 미국은 전례 없는 경제 호황을 경험했습니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업적에 자부심을 느꼈고, 그들의 자녀들은 어느 세대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경제 성장과 함께 임금 격차 또한 점차 확대되었지만, 모두의 임금이 오르는 동안 크게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사회 전체가 성장하는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빠르게 성장하던 경제는 점차 침체기에 들어섭니다. 성장이 둔화되자 그동안 감춰져 있던 구성원 간 격차와 차별에 대한 불만이 표면화됩니다.
나치는 몰락했지만, 사회 곳곳에 깊숙이 뿌리내린 그들의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서독 학생들이 ‘나치 청산’과 ‘권위주의 타파’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 했습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이어집니다.
68 운동 : “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
학생들의 정치 · 사회 개혁 요구는 점차 젊은 세대로, 노동자에게, 그리고 많은 대중의 외침으로 번져 나갑니다.

1968년 5월, 파리에서 시작된 학생 및 노동자 시위가 프랑스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됩니다. 곧 이어 서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면서 세계적인 ‘68 운동 May 68’이 시작됩니다.
당시 비틀즈는 젊은 세대의 상징 같은 존재였고 [ 페퍼상사 ]에는 당시의 ‘반권위주의’와 ‘히피 문화’ 정서가 잘 녹아 있습니다.
‘예술의 권위’에 도전 하다
많이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회의 부조리를 직접 비판한 ‘팝 아트’ 작품은 매우 드뭅니다. 하지만 ‘팝 아티스트’들은 상업 디자인의 문법을 정통 예술에 거부감 없이 사용하면서, 기존 ‘예술계의 권위’를 자연스럽게 비판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예술 = 고급문화’이며, 그 ‘고급문화’를 이끈다고 자부하던 평론가들도, 대중의 큰 관심을 받는 ‘팝 아트’를 끝까지 거부하진 못했습니다. 마침내 고상한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미술관 문턱도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학식과 권위로 무장한 제사장들이 굳게 지키던 ‘예술의 신전’에 광고, 만화, 영화 포스터, 스타의 사진 등 일상의 친근한 이미지가 접목된 ‘팝 아트’ 작품들이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팝 아티스트’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들의 작품에는 ’68 운동’의 구호인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ㆍIl est interdit d’interdire!ㆍ It’s forbidden to forbid!”와 같은 저항 정신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 팝 아트는 ‘낮은 하위문화 low culture’의 이미지를 예술 창작의 소재로 활용합니다..
- 팝 아트는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무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팝 아트’의 최전선 : ‘리처드 해밀턴’의 ‘콜라주’
‘팝 아트’ 하면, 앤디 워홀 Andy Warhol, 로이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 등의 미국 작가들이 먼저 생각납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조금 앞서 영국의 젊은 작가들이 일상 소재에서 예술의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리처드 해밀턴 [ 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 1956 ]](http://artcopost.com/wp-content/uploads/2025/02/리처드-해밀턴_Just-What-is-It-That-Makes-Todays-Homes-So-Different-So-Appealing.jpg)
“무엇이 오늘의 집을 그렇게 다양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가?” : 해밀턴은 잡지에서 오려낸 광고 이미지들을 조합해 1950년대 소비사회를 한 장면으로 포착해냅니다.
‘어떤 것이 예술인지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리처드 해밀턴 Richard Hamilton은 아이들의 놀이로 여겨지던 ‘오려 붙이기’를 당당히 미술관에 전시합니다.
“이것이 현대의 미술이다!”라는 감탄과 함께 “이게 예술이 될 수 있나?’’라는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두 반응 모두 ‘어떤 것이 예술인지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전시 직후 미술계는 “이 작품을 예술로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을 찾기 위해 분주해집니다.
해밀턴의 ‘콜라주’는 그 시대의 상식과 가치가 ‘예술 판정 기준’에 투영된다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또한, 그러한 상식과 가치가 반드시 고상한 고급 문화에서만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확인시켜줍니다.
해밀턴은 ‘콜라주 기법’으로 시대와 문화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잡지 속에 흩어져 있던 시대의 아이콘들을 한 장에 모아 놓은 그림은 당시 사람들이 ‘꿈꾸는 현대의 생활’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팝 아트’는 “대중매체와 소비문화의 시각 언어를 가공해 현대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드러낸다”는 미술 교과서의 설명을 ‘해밀턴의 콜라주’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해밀턴의 콜라주는 “매스미디어 이미지가 예술의 맥락 안에서 재구성된 기념비” 미술전문지 「Art in America」
POP + ART = [ 페퍼 상사 ] 앨범아트
대중 문화를 예술로 거듭나게 하는 ‘헤밀턴’의 전략은 [ 페퍼상사 ]의 ‘앨범아트’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1950~60대, ‘팝 아트’의 성장을 함께한 피터 블레이크와 잰 하워스는 비틀즈의 새 앨범에 ‘POP + ART’의 감각을 선보입니다.
‘폴 메카트니’가 펜으로 드로잉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피터와 잰’은 잘 알려진 대중문화 이미지 + 과거의 위인들 + 현대 스타를 한자리에 모아 마치 광고를 제작하듯, 새로운 문법의 ‘앨범아트’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들의 디자인은 ‘콜라주 기법’을 ‘앨범아트’로 확장한 시도로 지금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앨범아트 : 독립된 예술 작품으로
[ 페퍼상사 ]는 대중음악과 시각 예술의 만남을 통해 ‘앨범아트’의 위상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7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앨범 패키지상을 수상합니다
- 앨범아트가 “단순한 ‘레코드의 포장’을 넘어 음반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 전환점” – 음악 전문지 「 NME (New Musical Express) 」
- “음악사 최초로 앨범아트 자체가 시각 퍼포먼스이자 해석의 장이 된 순간” – 음악 전문지 「 Rolling Stone」
- “음악과 예술이 결합한 팝 아트 패키지로 한 장의 앨범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역사에 길이 남을 명반이다.” – 「 Apple Music 」
[ 페퍼상사 ]의 성공 이후, 앨범아트는 상품 포장을 넘어 음반의 의미와 메시지를 담는 시각 예술로 주목받게 되면서, 예술가 + 뮤지션의 협업이 활발해집니다.
대표적인 앨범으로 앤디 워홀 Andy Warhol과 벨벳 언더그라운드 The Velvet Underground가 함께한 [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가 있습니다.
피터 블레이크와 잰 하워스는 음반의 포장지를 뮤지션의 지향점을 가장 제일 먼저 드러내는 중요한 시각 장치로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콜라주 기법’을 앨범아트에 적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 비틀즈 [ 페퍼 상사 ] 2편 : 완성까지 험난 했던 ‘앨범아트’ 제작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