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울고, 여인이 달리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에 그려진 말 탄 여인 벽화를 통해 살펴보는 고대 여성의 지위와 문화적 의미, 그리고 다채로운 역사적 가치.”
낯선 고적지에서 말발굽 소리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1976년 발견된 고구려의 덕흥리 고분에서는 바람이 휑하니 스쳐가는 석실 안에 당당하게 말을 타고 달리는 여인의 모습이 벽화로 남아 있다. 그 장면을 처음 마주한 연구자들은 ‘어째서 말 위에 여인이 있는가’라는 호기심을 품었다. 귀족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승마가 벽화 속에서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실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금은 남녀가 동등하게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시대지만, 5세기 초 고구려에서 이미 말에 올라타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졌다는 것은 여성의 지위를 재조명하게 한다. 과연 덕흥리 고분 벽화 속 이 장면은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일까.
본 글에서는 덕흥리 고분이 왜 그렇게 중요한 유적인지, 그 안에 등장하는 여인은 어떤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말을 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그림이 오늘날까지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번영을 누리던 모습과, 현대의 시각에서 본 ‘고대 여성의 삶’이 어떻게 교차되는지 함께 탐구해보자.
발견의 순간,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피어난 신비
덕흥리 고분은 1976년,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에서 관개 공사를 진행하던 도중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미 도굴이 이루어진 상태였지만, 막상 무덤 내부를 살펴보니 앞칸과 널방(안칸) 등 벽과 천장, 통로 곳곳에 수많은 벽화들이 남아 있어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고분의 축조 연대는 영락(永樂) 18년, 즉 408년으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강성기를 이끈 광개토왕 시기의 연호다.
이 무덤에서는 600여 자에 달하는 묵서(墨書)와 정교한 생활풍속도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이 다양하고 구체적이라 ‘고구려 생활사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하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고구려 여성의 역할과 지위를 보여주는 여러 장면이다. 여기에는 태수들의 배례 장면, 의례를 진행하는 모습, 그리고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고 낯선 풍속을 서술해둔 여러 묵서가 담겨 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것은 방 안칸(널방)이나 서벽 등지에 그려진 ‘말을 타고 있는 여인’의 이미지다.
덕흥리 벽화고분의 구조와 벽화 구성
덕흥리 고분은 앞칸, 안칸으로 구성된 ‘이실분(二室墳)’ 형태로 지어졌다. 무덤 내부로 들어가는 널길(연도)과 앞방, 그리고 앞방에서 다시 널방으로 통하는 통로가 이어지는데, 벽과 천장은 가공된 돌을 여러 겹으로 쌓고 궁륭형으로 마감했다. 당시 고구려인들은 돌 위에 흰색 석회를 칠한 뒤 여러 색감의 안료(흑, 갈색, 노란색, 붉은색, 녹색 등)를 사용해 벽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앞칸에는 무덤 주인의 정사도(政事圖), 태수 13인이 조공을 바치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고, 천장 궁륭 부분에는 천상세계와 수렵도가 표현돼 있다. 안칸 북벽에는 묘주의 일상생활 장면, 서벽에는 승마를 포함한 무예 관련 그림, 동벽에는 불교의 칠보공양 행사 장면 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서벽 무예 장면 중 일부가 ‘말 위에 여인’이 등장한다고 전해진다.
여인은 왜 말 위에 있었나
고구려는 북방 유목문화를 받아들여 말 타기가 상당히 발달한 사회였다.
수렵도, 마상궁술(馬上弓術)을 비롯해 군사적 역량에서도 말은 핵심 자산이었다. 그런데 벽화 속에서 당당히 말을 타고 활을 쏘거나 무예를 겨루는 여성의 등장은, 고구려에서 어느 정도 여성의 참여 기회가 열려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실 남자 전사와 함께 말을 타는 여성이 등장하는 장면은 고구려 벽화에서 흔치 않다. 덕흥리 고분이 이러한 파격적 묘사를 남긴 덕분에 우리는 고구려 여성의 한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학자들은 여성 승마 장면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한다. 일부는 귀족 계층의 딸이나 부인이 사냥 행사나 군사 훈련에 참여한 모습이라고 보고, 또 다른 견해는 ‘고구려가 동맹 등 국가 제천행사에서 여성의 활약을 용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일종의 상징적 표현으로, 현실보다 조금 이상화한 모습이라는 의견도 제시된다. 어느 쪽이건 간에, 이 벽화가 “고구려는 북방 기마 민족의 전통 안에서 여성들에게도 일말의 역할과 자율성을 부여했던 사회”였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고구려 여성의 지위, 그리고 덕흥리 고분이 말하는 것
4세기~5세기 무렵 고구려 여성은 결혼 풍습이나 제천 행사에서 남성보다 자유롭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비교적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는 학설이 전해진다.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등 당시 혼인 관습에서 여성이 자율적으로 결혼 여부를 선택하거나 여러 사회 행사에 적극 참여한 사례가 전해지기도 한다. 물론 모든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향유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계층과 가문에 따라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여성도 존재했던 듯하다.
덕흥리 벽화고분에서는 여성 통역사로 보이는 장면도 포착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외교나 각종 국가 행사에서도 여성이 참여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4]. 게다가 궁중 의례나 사적인 연회 자리에 여성들이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심지어 말까지 탄 모습이 벽화에 묘사되어 있다는 것은 후대 조선 시기와 상당히 다른 여성상을 암시한다. 적어도 고구려 사회 내 특정 계층 여성들은 공적인 자리에 나설 수 있었으며, 필요하다면 군마를 다룰 정도의 기예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풍부한 벽화와 묵서, 역사의 보물창고
덕흥리 벽화고분은 무엇보다 명확한 축조 연대가 ‘영락 18년(408)’으로 확인된다는 점이 특별하다. 묘주(무덤 주인)가 유주자사로 불린 진(鎭)이라는 인물이었음이 명문(銘文)에 적시되어 있고, 이 벽화에는 당시 중국 북조 지역과의 관계나 고구려 내부 생활 풍습을 엿볼 수 있는 실마리가 다수 담겨 있다.
벽화 장면은 정치·사회·종교·생활풍속 등 다방면에 걸쳐 다양해서, 고구려 역사 연구에 결정적 힌트를 제공한다. 특히 ‘여성 인물들이 통역이나 접견, 혹은 무예 훈련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중세나 근세 어느 시기를 봐도 흔치 않은 그림이라, 국제학술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는다. 이런 풍부한 내용은 훗날 고구려가 북방 기마민족의 기질과 동아시아 문화를 종합적으로 도입해 독특한 문화를 이뤘다는 평가와 맞물린다.
현무암 벽 뒤, 시간 속에 묻힌 말발굽 소리
벽화의 군마(軍馬)들은 대체로 머리가 크고 목이 두꺼우며, 다리가 짧은 편으로 묘사된다. 이는 고구려가 기른 토종 마필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말은 크기보다는 지구력이 뛰어나고 산악 지형에서도 기동성이 우수해서, 실제 전투나 사냥, 연회 등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렇듯 벽화 한 모퉁이에 표현된 말 한 필도 고구려인의 삶과 밀접한 존재였음을 실감케 하고, 나아가 말 위에 탄 여성상이 고구려의 사회·문화적 풍경 일부를 생생히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시대적 배경과 현재의 시선
5세기 초 고구려는 광개토왕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을 이루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의 패권을 다졌다. 북방의 유목 전통과 중원(中原) 지역의 문화를 투영하며 독창적 예술과 생활양식을 형성했다. 당시에는 여성도 말 타는 데 참여하거나, 더 나아가 궁술을 익히는 모습이 벽화에 등장할 정도였으니, 이 시기는 한민족 역사상 유독 활달하고 대범한 기풍이 깃들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고구려 여성들은 지금의 여성처럼 자유롭게 사회생활을 했을까 궁금증이 생긴다. 물론 한계를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덕흥리 벽화에서 엿보이듯 일부 여성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고 능동적으로 활동하던 흔적을 남겼다. “남성의 시중을 들거나 뒤치다꺼리를 한다”라는 패턴과 달리, 말 위에서 주체적으로 모습을 뽐내는 여성 인물은 문화사적 충격을 던져줄 만큼 이례적이다.
덕흥리 고분의 현재 모습과 관람 가능성
덕흥리 고분은 지금 북한 지역(남포시 강서구역) 내에 있으므로 남한 지역에서 직접 탐방하기는 어렵다.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어 북한도 해당 벽화고분을 중요한 역사·관광 자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다만 대중이 직접 들어가 감상하기에는 보존상의 문제도 있고, 접근성도 제한적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대다수가 습도나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무분별한 관광은 벽화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현재는 3D 스캔, 디지털 복원 등을 통해 덕흥리 고분의 내부 모습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시도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반도나 해외에서 열린 학술 전시회의 일부 섹션에서 덕흥리 벽화 자료가 소개되기도 한다.
특히 말을 탄 여인 모습을 재현한 디지털 이미지나, 다채로운 복식·머리 모양 등에 주목하는 영상 콘텐츠들이 제작되어,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인도 쉽게 관람할 기회를 얻고 있다.
더 다채로운 연구의 여지
이 벽화 한 장면을 놓고도 ‘실제 상황을 그대로 그린 것인가’, ‘의례용으로 강조한 상징적 표현인가’를 두고 다양한 견해가 충돌한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여성 승마대가 존재했을지 의문이다”라며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반면, 고구려는 대외전쟁과 수렵문화가 발달했으니 의외로 당연한 장면일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여성 통역사, 여성 관리, 여성 무예가가 등장하는 벽화들을 종합해볼 때, 고구려 여성상은 매우 진취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연구도 있다. 반면 이러한 해석이 지나치게 부분적 사례를 일반화한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덕흥리 고분은 ‘한 점의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여러 층위의 역사’를 읽어내려는 다양한 시도가 공존하는 장(場)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미술사의 관점: 벽화 기법과 예술적 가치
덕흥리 고분 벽화는 초기 (4세기~5세기 초) 고구려 벽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안악3호분과 함께 당시 생활풍속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는데, 다소 투박하지만 힘이 넘치는 선묘, 대담한 색채, 단순화된 배경 등이 특징적이다. 앞칸 천장에 펼쳐진 궁륭고임 형태 덕분에, 곡선을 따라 벽화가 연장되는 구성이 매력적이다.
마치 만화처럼 인물을 펼쳐놓는 방식은 공간감을 제한하는 동시에, 인물의 동작을 생생히 부각한다. 이는 중국이나 서역의 영향도 일부 보이지만 고구려 특유의 활달한 미감이 담겨 있다. 말을 타고 있는 여인이라든지, 다양한 시녀나 무사들의 모습은 스냅샷처럼 순간적인 동작을 잡아낸 듯 사실적이다. 이런 강렬한 시각적 표현 덕분에, 현대 예술가들도 고구려 벽화에서 화풍과 색감을 차용하기도 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연구와 보존
고구려 벽화는 외부 공기나 습도 변화에 취약해 훼손이 빠르게 진행될 위험이 있다. 북한이 보존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는 하나, 국제 협력이 원활하지 않은 탓에 보존 상태가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복원이나 레플리카 제작을 통해 덕흥리 고분 벽화를 전 세계인에게 공개하려는 시도는 빛이 난다. 이때 “말 탄 여인” 이미지는 고구려 문화의 독특함과 여성의 활약상을 알릴 수 있는 대표 아이콘으로 활용될 만하다.
이렇듯, 한 장의 벽화가 전해주는 여운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과연 고구려 여성들은 얼마나 자유롭고 역동적인 삶을 살았을까. 국내외 학자들은 벽화 해석과 문헌연구, 부장품 분석 등을 총동원하여 ‘당시 고구려인들의 진짜 일상’을 복원해보려 노력 중이다. 어쩌면 덕흥리 고분 벽화는 앞으로도 여러 해석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보고(寶庫)다.
말 굽소리 뒤에 피어난 당당한 여성상
덕흥리 고분 벽화의 “말 탄 여인”은 고구려 시대로부터 전해져온 강렬한 인상을 현대의 우리에게 선물한다. 흔히 과거는 여성의 지위가 낮았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 한 장면은 “문화와 시대에 따라 여성의 역할은 훨씬 다채로울 수 있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물론 모든 여성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살았을 가능성은 적지만, 귀족 여성들 중에는 남성 못지않게 사회 제도나 의례에 적극 참여한 사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생각지 못한 선물 같은 벽화가 말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고구려가 대단했다”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현대에도 여전히 과거에 대한 편견이나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덕흥리 고분 속 이 한 장면은 어쩌면 우리에게 ‘고정관념을 깨라’고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치관과 역사관을 새롭게 각성시키는 예술적 장치로서, 덕흥리 벽화고분은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이야기책이 된다. 바람 한 점 없는 고분 안에 말을 탄 여인은 여전히 눈부시게 달린다. 그 자유로운 발걸음이 고구려 여성의 또 다른 얼굴을 후대의 우리에게 맡기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