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의 아홉 번째 정규 앨범 ‘The Beatles’는 ‘빈 캔버스’를 연상시키는 순백의 디자인으로 [ 화이트 앨범, The White Album ]으로 더 많이 불려지고 있습니다.
명화가 된 앨범아트 2 . 비틀즈 [ 화이트 앨범, 1968 ]
- 미니멀리즘 : 비틀즈의 다양한 음악을 담은 ‘텅 빈 캔버스’
- 희소성 & 가치 : ‘79만 달러’에 낙찰된 중고 레코드판
1960년대 ‘앨범아트’는 음반의 단순한 포장을 넘어 아티스트의 정체성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틀즈’는 이러한 ‘음악+시각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한 대표적인 팝스타 중 하나입니다.
‘채움’에서 ‘비움’으로
1967년 당시 레코드샵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앨범은 단연 ‘비틀즈’의 8집 [ 페퍼상사 ]였습니다. 역사 속 위인과 스타들이 화려하게 ‘콜라주’된 ‘앨범아트’는 히트곡만큼이나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년 5개월 후, ‘비틀즈’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새로 발매된 비틀즈의 9집은 하얀 종이로 감싼 듯 순백색일 뿐이었습니다. 찬찬히 살펴봐야 오른쪽 모서리에서 양각으로 새겨진 ‘The Beatles’라는 글자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페퍼상사 vs 화이트 앨범
비틀즈의 8집과 9집은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 여러 특징들로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디자인 : 콜라주 vs 미니멀리즘
- 패퍼상사 : 컬러풀한 콜라주로 ‘가득 채운’ 시각 효과를 선보였다면,
- 화이트 앨범 :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 ‘텅 빈’ 미니멀리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음악 : 통일성 vs 다양성
비틀즈는 이미 [ 페퍼 상사 ] 녹음 과정에서 서로 조율하며 곡을 완성하는 팀웍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폴 매카트니의 아이디어가 강하게 반영되면서, 존 레논은 자신의 곡들을 수정했고, 조지 해리슨은 단 한 곡을 수록했으며, 링고 스타는 거의 배제되다시피 했습니다.
- 패퍼상사 : 폴 매카트니가 주도한 컨셉에 따라 수록곡 전체가 하나로 통일된 음악을 목표로 제작된 반면,
- 화이트 앨범 : 멤버들 각자 추구하는 음악을 다양한 장르로 채웠습니다. ‘단편 소설을 모아놓은 작품집 Anthology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판매량 : 3200만장 vs 1600만장
- 패퍼상사 : 3,200만장 팔려 나가며 비틀즈 정규 앨범 중 가장 성공한 반면,
- 화이트 앨범 : 1,600만장을 기록하며 절반의 판매량을 보였습니다.
평가 : 극찬 vs 재평가
- 발매 후 극찬을 받았던 [ 페퍼 상사 ]와 달리 [ 화이트 앨범]은 ‘커버에 밴드 이름만 세겨넣고, 두 장의 LP를 일관성 없는 곡들로 가득 채우고 있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 1990년대 부터 [ 화이트 앨범 ]의 혁신적인 장르 구성이 재평가 받으며, 그동안 높은 평가를 받아온 [ 페퍼 상사 ]의 명성을 넘어섭니다.
미니멀리즘 : 비틀즈의 다양한 음악을 담은 ‘텅 빈 캔버스’
앨범아트를 디자인한 인물은 영국 팝 아티스트 리처드 해밀턴 Richard Hamilton 입니다. 화려한 ‘콜라주’ 작품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해밀턴은 비틀즈에게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이미지를 최대한 줄여보자!’
예상을 깬 해밀턴의 제안에 비틀즈는 크게 공감합니다. 그리고 헤밀턴은 [ 페퍼상사 ]의 화려하고 꽉 찬 느낌을 거부하 듯, 장식이 완전히 배제된 ‘비어 있는 Empty’ 공간을 디자인 언어로 제시하게 됩니다.
‘순백’의 디자인 : 의도된 비움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앨범 아트가 경쟁적으로 선보이던 대중음악 시장에서, 해밀턴의 ‘텅 빈’ 디자인은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마치 시선을 압도했던 [ 페퍼상사 ]와는 ‘정반대의 디자인을 하겠다’는, ‘화려함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처럼 보였습니다.
의도된 비움 Empty
새로 산 가방은 내부가 텅 비어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용하다 보면 가방 안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하나둘 자리하게 됩니다. 자동차 키를 찾기 위해 가방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사라졌던 이어폰 한쪽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 복잡해진 가방 안을 정리합니다. 꼭 필요한 물건을 선별하고 위치를 지정합니다. 자갑과 이어폰은 안주머니, 키는 앞 주머니 …
‘의도적인 비움’이란 가방 정리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는 행위입니다.
가방 손잡이를 제거하거나, 안주머니를 제거하거나 … 그러다 보면 ‘무언가를 담는다’는 최소 기능만을 남긴 채 ‘봉투’인지 ‘가방’인지 구분이 안가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봉투’와 다를 바 없어진 ‘가방’을 처음 접한 사람은 “뭐 그냥 볼품 없는 ‘봉투구만”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비워지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비움’이라는 ‘행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말레비치 [ 흰색 위의 흰색, White on White, 1918 ]
100년 전, 무언가로 가득 채워진 그림들이 걸려있던 전시장 한켠에 ‘비움’을 시도한 그림이 등장합니다.
20세기 초반 순수 추상을 추구한 전위 예술가 카지미르 말레비치 Kazimir Malevich의 1918년 작품 [ 흰색 위의 흰색 ]는 흰색 바탕위에 살짝 기울어진 흰색 사각형 하나만이 캔버스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관람자에게 그동안 그림들이 보여 주었던 구체적인 형태나 주제를 제거한 채, 캔버스와 (흰)색 그리고 (사각형)면 자체를 직시하게 합니다.
말레비치는 예술의 대상(사람, 사물, 풍경 …)과 개념을 순수 형태(삼각, 사각 원 … )로 환원하는 작업을 통해, 관람자의 내면적 사유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비틀즈 [ 화이트 앨범 ]
해밀턴 역시 ‘앨범아트’라는 ‘상업미술’을 → ‘순수예술’의 무대로 옮겨 ‘예술개념’의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 화이트 앨범 ]의 텅 빈 공간은 관람자 (청취자)에게 비어 있는 상태를 바라보고 생각하게 합니다. ‘필요 없는 것을 덜어내고, 작품 본질에 집중한다’라는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 화이트 앨범 ]은 정확히 공유하고 있습니다.
-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고, 오히려
-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하나의 메시지로 가공하여,
- 관람자가 자유롭게 해석하고 의미를 투영할 자리를 마련하는 …
통일성 vs 다양성 : 모든 색을 담아내는 하얀색
조용한 어쿠스틱 발라드부터 거친 록, 아방가르드 사운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가 담긴 [ 화이트 앨범 ]은 두장의 레코드에 총 30곡이 수록 되어 있습니다.
반면 음반의 커버는 단지 ‘백색’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폭넓은 장르의 수록곡과 대비되는 ‘단순한 커버’는 ‘멤버 각자의 개성과 다양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는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다양한’ 음악을 담은 & ‘단순한’ 디자인
‘하얀색’은 비틀즈 멤버 각자의 개성을 여러 색깔의 음표로 마음껏 그려낼 수 있는 ‘빈 캔버스’를 제시한 듯 보입니다. 그리고 음반을 처음 접하는 팬들에겐 비틀즈 맴버들의 다채로움을 감상할 ‘빈 공간’을 선사하는 듯합니다.
“조용한 방 안에 앉아 비틀즈의 새로운 곡들을 만나는 개인적인 시간”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 해밀턴이 선택한 하얀색은 “비어 있음 & 무한한 가능”을 동시에 상징한다. 「 Frieze 」
- “전작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비틀즈가 새롭게 펼쳐갈 창작 영역으로 청취자를 초대하는 개념적 캔버스 역할을 했다” 「 Rolling Stone, 화이트 앨범 50주년 기념 기사 」
강요 된 하얀색?
“특정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은 앨범아트는, 감상자에게 자기만의 감성으로 비틀즈를 경험하게 만든다”
하지만, 다시한번 ‘화이트’라는 색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화이트가 ‘다양함’의 계기가 아닌, ‘다양함’을 강요하는 강령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 화이트가 ‘텅 빈 공간’ 이라는 이미지를 강요하며, 다른 색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떠한 경험을 ‘제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경험이 ‘강요’되어선 안 됩니다. 누군가는 [ 화이트 앨범 ]을 보며 ‘미니멀아트’의 표준이라며 극찬할 수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볼품 없다’며 시큰둥할 수도 있습니다.
대중예술의 강인함은 다양한 해석을 쉼없이 만들어내는 대중으로부터 나옵니다.
‘미니멀아트’가 미술관 뒤에서 고상한 평론의 세례를 받으며 신격화 되고 있는 동안, 비틀즈의 [ 화이트 앨범 ]은 오늘도 레코드샵 한 켠에서 대중의 사랑과 비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틀즈 : ‘다양’ vs ‘분열’의 경계에서
[ 화이트 앨범 ]을 준비하면서 맴버들은 각자의 색깔을 확인하는데 공을 들이기 시작합니다. 개인의 창작 욕구가 반영된 시도들이 다양한 음악 장르에 녹아 들며 다채로운 곡들로 탄생합니다. 네명의 멤버들은 각자의 곡들을 모자이크처럼 수 놓으며, 이전보다 확장 된 음악 세계를 완성시켜 갑니다.
하지만 [ 화이트 앨범 ]은 비틀즈의 분열을 드러낸 앨범으로 이야기 됩니다. ‘다양함’이 언제나 ‘분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비틀즈 멤버들이 보여준 ‘다양함’은 앨범 제작 과정에서 ‘분열’의 모습으로 이어졌습니다.
표출되는 각자의 ‘개성’
순백의 앨범아트가 주는 평온함과는 달리, 멤버들의 이런저런 불화로 녹음실 분위기는 평온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스튜디오에서의 긴장감

[ 페퍼상사 ]의 녹음 작업부터 많은 부분이 ‘폴 매카트니’의 결정으로 진행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폴의 태도에 다른 멤버들의 반감이 쌓여갔습니다. [ 화이트 앨범 ]의 녹음 기간 동안 조지 해리슨은 자신의 곡들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링고 스타는 작업 도중 밴드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멤버들 사이를 조율하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후반 작업은 멤버들이 서로 시간을 피해가며 각자 진행하게 됩니다. 보통 엉망이 되기 마련인 상황이지만, 비틀즈 멤버들에겐 각자 자유롭게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줍니다.
[ 화이트 앨범 ]의 곡들은 대부분 레논-매카트니 Lennon-McCartney 명의로 등록되어있만, 멤버 개개인이 주도하여 작곡한 곡들이 많습니다.
- 존 레논 주도 : Dear Prudence, Glass Onion, Happiness Is a Warm Gun, I’m So Tired, Julia, Yer Blues, Sexy Sadie, Everybody’s Got Something to Hide Except Me and My Monkey, Cry Baby Cry, Revolution 1, Revolution 9
- 폴 매카트니 주도 : Back in the U.S.S.R., Ob-La-Di, Ob-La-Da, Martha My Dear, Blackbird, Rocky Raccoon,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 I Will, Birthday, Mother Nature’s Son, Helter Skelter, Honey Pie
- 조지 해리슨 작곡 :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Piggies, Long, Long, Long, Savoy Truffle
- 링고 스타 작곡 : Don’t Pass Me By
- 폴 & 존 협업 : Good Night (존 레논 작곡, 링고 보컬)
서로 다른 음악 언어
‘여성의 비명, 아기 울음, 제트 엔진, 총 소리 등’ 다양한 효과음으로 가득한 존 레논의 ‘Revolution 9’과
마치 동요같은 폴 매카트니의 ‘Ob-La-Di, Ob-La-Da’가 보여주는 극명한 대조는, 밴드가 추구하는 사운드를 두고 멤버들간 벌어진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존 레논의 연인 ‘오노 요코’
존 레논은 새 연인 오노 요코를 밴드 멤버처럼 대했습니다. 스튜디오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오노 요코의 존재와 레논의 태도에 다른 멤버들은 불편함을 자주 표현했다고 전해집니다. 비틀즈 팬들 사이에서 밴드 해체 원인으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부분입니다.
오노 요코의 등장이 기폭제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가장 큰 원인은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음악적 성향 차이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페퍼상사 ]는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통일된 컨셉의 힘을 확실히 보여 줍니다. 반면 [ 화이트 앨범 ]은 어느 때보다 각 맴버들의 다양한 음악 성향을 한데 모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두 앨범이 만들어지는 동안 비틀즈는 점차 그룹에서 개인으로 분열되어 갔습니다.
그럼에도 비틀즈 팬들에게 [ 화이트 앨범 ]은 여전히 특별한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2013년에는 팬들이 소장한 2207개의 [ 화이트 앨범 ]을 한데 모아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2015년 한 경매에서 일련번호 ‘0000001’이 찍힌 [ 화이트 앨범 ]이 79만 달러에 낙찰 됩니다.
앨범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은 비틀즈의 드러머 ‘링고 스타’였습니다.
→ 비틀즈 [ 화이트 앨범 ] 2편 : ‘희소성’이 선사하는 ‘물질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