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수 전시, 흰 우유의 어둠에서 기억의 풍경을 만나다

어릴 때 자주 걷던 길을 떠올려보면 실제 모습과 기억 속 풍경이 꼭 같지는 않습니다. 유난히 높았던 나무, 오래 남은 냄새, 당시에는 뜻을 몰랐던 어른들의 이야기가 한데 섞입니다. 박광수의 그림은 이런 기억의 움직임을 닮았습니다. 익숙한 들판과 숲을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 현실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장면을 함께 놓습니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에서 11월 5일 문을 연 박광수 개인전 《흰 우유의 어둠》은 12월 5일까지 이어집니다.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철원의 자연과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회화로 풀어낸 전시입니다. 풍경 속에 무엇이 그려졌는지 찾는 재미와 함께, 선과 색이 눈을 어디로 이끄는지 살펴볼 만합니다.

고향을 그리지만, 옛날 사진처럼 옮기지는 않습니다

공식 전시 소개에서 철원은 눈 덮인 들판, 논밭과 옥수수, 숲과 저수지로 등장합니다.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만으로 기억되는 장소가 아닙니다. 작가는 옥수수를 먹던 평범한 여름날과 지뢰 지대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떠올립니다. 익숙한 생활과 불안한 역사가 같은 땅에 겹쳐 있었던 셈입니다.

작가는 이 경험을 시간 순서대로 설명하는 장면으로 정리하지 않습니다. 오래전의 일과 지금의 감각, 실제로 본 것과 상상한 것을 한 화면에 불러옵니다. 대상을 알아보았는데도 서로 왜 함께 있는지 바로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 어긋남이야말로 그림을 살피는 출발점이 됩니다.

따라서 전시를 철원의 특정 장소를 맞히는 퀴즈처럼 볼 필요는 없습니다. 화면 안에서 익숙한 부분을 하나 찾고, 그 옆에 놓인 낯선 부분을 비교해보세요. 두 장면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 갑자기 다른 시간으로 옮겨간 듯한지 느껴보면 됩니다. 작가의 기억을 모두 알지 못해도 내 경험과 만나는 지점은 찾을 수 있습니다.

박광수의 2026년 유화 설원 전체 화면
박광수, 〈설원〉, 2026.

〈설원〉에서는 흰 부분부터 천천히 따라가 보세요

〈설원〉은 2026년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작품입니다. 먼저 화면을 멀리서 보며 밝은 부분이 어느 정도의 면적을 차지하는지 살펴보세요. 이어 조금 가까이에서 밝은 곳 사이로 지나가는 선과 색을 찾아봅니다. 제목이 알려주는 눈밭의 인상과 눈앞의 복잡한 흔적이 어떻게 만나는지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흰색은 단순히 환한 배경으로만 쓰이지 않습니다. 학고재의 설명은 흰색이 강한 색과 어두운 색 사이에서 무게감을 만들 수 있다고 짚습니다. 흰 부분을 빈자리라고 지나치기보다, 주변 색을 밀어내는지 감싸는지 살펴보세요. 밝은 면이 오히려 두껍고 묵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온라인 사진으로 먼저 볼 때와 전시장에서 실제 크기로 볼 때의 인상도 구분하면 좋습니다. 〈설원〉의 크기는 130.3×162.2cm입니다. 휴대전화에서는 작은 선으로 보이던 것이 실제 그림에서는 몸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감상할 때는 작품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전체를 본 뒤, 다른 관람객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까운 부분을 살펴보세요.

작품 이미지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푸른 계열의 바탕을 가르는 주황빛 선입니다. 같은 나무를 떠올리더라도 실제 나무의 갈색과는 다른 인상을 줍니다. 제목만 읽었을 때 상상한 하얀 눈밭과 화면의 색을 비교해보세요. 색을 현실과 똑같이 맞추는 대신 기억 속 감각을 더 강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선을 따라가면 대상과 배경의 경계가 흔들립니다

박광수는 선을 덧긋고 이미 그린 곳을 문지르거나 긁어낸 뒤 다시 물감을 올립니다. 공식 소개는 이런 과정을 철원의 숲에서 부러진 가지들이 뒤엉켜 있던 경험과 연결합니다. 하나의 선이 대상을 또렷하게 구분하기도 하고, 다른 선과 만나 그 구분을 흐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림 앞에서는 눈에 들어온 선 하나를 골라 끝까지 따라가 보세요. 처음에는 나뭇가지처럼 보이던 선이 다른 형상으로 이어지는지,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앞으로 다가오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 번에 화면 전체를 해석하려 하기보다 작은 경로를 하나씩 찾아보는 방법입니다.

대표 작품 이미지로 소개한 〈백색 물질〉도 이런 비교에 어울립니다. 흰 부분과 그 주변의 색, 화면을 가로지르는 흔적을 번갈아 보세요. 작품 제목은 감상을 여는 힌트이지만 각 형상에 하나의 뜻을 확정하는 답안은 아닙니다. 먼저 보이는 것을 말해보고 제목을 다시 읽으면 처음과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지뢰와 이빨〉, 작고 개인적인 기억 옆의 큰 역사

〈지뢰와 이빨〉이라는 제목에는 쉽게 한 쌍으로 묶이지 않는 두 단어가 놓여 있습니다. 전시 소개에 따르면 작가의 고향 땅에는 어린 시절 빠진 유치가 묻혀 있고, 발견되지 않은 지뢰도 남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성장에 속하는 작은 기억과 분단의 현실이 같은 땅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이 배경을 알고 보면 제목이 단순히 기이한 조합으로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림 속 특정한 모양을 반드시 이빨이나 지뢰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공식 설명으로 확인한 작가의 경험과 내가 그림에서 연상한 이미지를 나누어 생각해보세요. 실제 경험이 어떻게 다른 형태의 풍경으로 바뀌었는지 살피는 편이 작품의 여지를 넓혀줍니다.

박광수의 2026년 유화 지뢰와 이빨 전체 화면
박광수, 〈지뢰와 이빨〉, 2026.

두 작품의 크기 차이를 떠올려보는 것도 좋습니다. 〈지뢰와 이빨〉은 45.5×53cm로, 앞서 본 〈설원〉보다 작습니다. 같은 작가의 그림이라도 큰 화면은 시야를 넓게 움직이게 하고 작은 화면은 한곳에 시선을 모으게 할 수 있습니다. 크기가 감상의 속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비교해보세요.

이번 주말에는 토요일 관람을 계획하세요

학고재의 공식 운영 안내는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10:00~18:00이며,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무입니다. 주말 나들이로 생각하고 있다면 11월 7일 토요일을 기준으로 계획하는 편이 좋습니다. 전시 기간 안이라고 해서 일요일에도 열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두세요.

처음에는 작품 세 점 정도만 골라 비교해도 충분합니다. 흰 면이 큰 그림, 선이 촘촘한 그림, 제목이 마음에 걸린 그림을 각각 하나씩 골라보세요. 무엇이 더 잘 그려졌는지 순위를 매기기보다 같은 기억이 어떻게 서로 다른 풍경이 되는지 살피는 방식입니다. 삼청동 산책 일정과 묶더라도 그림 앞에 잠시 머물 시간은 남겨두면 좋겠습니다.

  • 전시: 박광수 개인전 《흰 우유의 어둠》
  • 기간: 2026년 11월 5일~12월 5일
  • 장소: 학고재, 서울 종로구 삼청로 50
  • 운영: 화~토 10:00~18:00, 일·월 휴무. 방문 전 공식 안내와 변경 공지를 확인하세요.

궁금한 점

제목에 우유가 나오니 우유를 그린 전시인가요?

우유의 불투명한 흰색에서 다른 깊이를 상상하는 철학적 발상에서 제목을 가져왔습니다. 이번 전시는 고향의 기억과 상상이 만나는 회화를 중심으로 봐도 좋습니다.

철학 책을 미리 읽고 가야 하나요?

선과 색, 크기를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감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목의 배경은 작품을 본 뒤 다시 떠올려도 괜찮습니다.

일요일에 갈 수 있나요?

공식 운영 안내상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무입니다. 토요일 운영 시간과 전시 기간을 구분해 확인하세요.

전시를 보고 나온 뒤에는 어린 시절의 장소 하나를 떠올려보세요. 실제 모습보다 크게 기억되는 것, 냄새나 소리로 남은 것, 나중에야 뜻을 알게 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박광수의 풍경은 그런 기억들이 한 장면에서 다시 만날 때 어떤 그림이 생기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학고재 공식 전시·작품 보기 →

자료: 학고재 전시 안내 · 관람·연락처 안내. 작품 이미지: 박광수·학고재, 대표 〈백색 물질〉 및 본문 〈설원〉·〈지뢰와 이빨〉(모두 2026), 공식 작품 원본.